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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청불 인물 엿보기

자신의 최후를 예측한 폭군 연산군 엿보기

by ISTJ, 회계쟁이 2024.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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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조선 10대 국왕이자 7명 밖에 되지 않는 적장자 출신의 왕으로 정통성이 매우 확고한 국왕이었다.

그런 그였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시점으로 폭군의 길을 걷게 되었고, 중종 반정이 있기 열흘 전에는 자신의 폐위를 예측하거나 짐작한 듯하다.

그리고 많은 사극에서 발광했다는 표현과는 달리 교동도로 유배될 때도 꽤 점잖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주요 언행>

1. 반정 열흘 전, “인생은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이라며, 눈물을 흘리고는 장녹수에게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의 변이 있겠느냐만은, 만일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는 필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다.

 

2. 중종 반정 세력이 옥새를 내놓으라 하자, 도주했다는 기록이 있는 광해군과는 달리, “내 죄가 중하여 이리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여라.”라고 했으며, 교동도로 유배될 때에도 "내가 죄가 큰데 상(중종)의 덕을 입어 무사히 간다."라고 말하며 점잖게 행동했다고 한다.

 

3. 신하들에게 "입은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내용의 신언패(愼言牌)를 차게 하고, 흥청들과의 나들이길에 신하들을 동원하여 왕의 가마를 메게 하다.

 

4. 자신의 악행을 비방하는 언문(한글)으로 작성된 투서가 나돌자 범인을 잡으려 했으나, 실패. 이에 화풀이로 훈민정음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 구결을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우다. 이는 선대왕의 업적을 부정하는 패륜에 해당하는 일.

 

 

 

<주요 에피소드>

1. 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폐비에서 지위를 복원하거나, 폐비 윤씨를 모함한 귀인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등의 행동에서 효자라는 의견도 있으나, 어머니의 기일에 성관계를 하는 패륜을 행했다는 것으로 보아 갑자사화는 철저하게 계획된 정치적 행동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2. 위에서 죽음을 당한 귀인들은 시체가 갈가리 찢겨 젓갈로 만들어져 산과 들에 버려졌다고 하며, 안양군은 어미를 때린 패륜이니 사형당해야 하며, 봉안군은 때리라는 왕의 명령을 거역했으니 사형당해야 한다며, 귀양지에서 사사하다.

 

3. 채홍사, 채청사을 전국에 파견하여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하다. 그 중에서 가장 예쁘고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는 미녀들을 따로 뽑아 "흥청"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이 '연산군이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했다' 라면서 "흥청망청(興淸亡淸)"의 어원이 되었다.

 

4 이들을 간택할 때, 민낯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처녀보다는 임신한 여인 또는 남편이 있던 여인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중년이나 노년도 있었다고 한다. 뽑혀온 자들 중에 친자매가 있다면 한 명 빼고 모두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5.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불러 세자를 돌보기 위해 궁에 들어오라고 하고는 간통하고 승평부 대부인이라는 도장을 만들어 주다. 야사에서는 강간당하고 부끄러워서 자살했다는 기록이 있다.

 

6. 그러나, 박씨가 50대로 추정되는 나이였으니, 간통하기에는 너무 나이도 많았고, 남편 월산 대군의 요절 후 절까지 지어가며 슬퍼할 정도로 부부 금슬도 좋았다 한다. 유학자들과 척을 져 사관에게 밉보인 결과에 따른 루머라는 말도 있다.

 

 

 

7. 신하들의 아내까지 은밀하게 불러 간음을 하다. 신하들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고, 참석하면 아내가 왕에게 범해지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결과적으로 숨죽이고 있던 신하들도 서서히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자기가 당하는 어쩔 없다 치더라도 아내가 모욕을 당하면 참을 없으니까."라고 말할 지경이었다 한다.

 

8. 위의 신하들 연산군 폐출에 가담한 일부는 그나마 명예라도 찾았지만, 끝까지도 들고 일어나지 못한 신하들은 중종 즉위 이후에도 놀림당했다고 한다.

 

9. 사슴의 혀로 만든 요리처럼 진사치가 심했으며, 금산(禁山)과 금표(禁標)를 지정하며 대간들의 농토 사유지를 빼앗다. 금표 설정이 동서남북으로 100여 리에 달하다 보니 경기도가 좁아져, 충청도이던 안성과 평택이 경기도로 편입되었다 한다.

 

10. 성균관을 폐쇄하고, 학생들을 쫓아낸 다음, 놀이터로 만들었으며, 경기도 일대에 금산(禁山)을 지정하고 그 안에 사냥터를 만들다.

 

 

 

<다른 일면>

1. 즉위 초반에는 빈민을 구제하고, 성종 말기에 흐트러진 기강을 고쳐 잡으려 할 정도로 정치에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2. 대비들을 극진하게 모시고, 신하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고, 나태해지는 걸 스스로 경계하는 등의 모습도 있었다.

 

3. 북방 여진족이나 전라도 섬에 나타난 해적들을 격퇴하는 등의 업적도 있다.

 

 

 

<나의 인물 요약>

재위 초기에는 정상적인 군주의 모습으로 일관했던 것을 보면,

폐비 윤씨의 피 뭍은 적삼 사건(정사의 기록은 아님)을 계기로 연산군이 폭군의 길로 들어선 점은 분명하겠지만,

스스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있음을 인지했으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폭주하며 미쳐 날뛰게 된 인물일 가능성을 미뤄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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