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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청불 인물 엿보기

선조의 막장 왕자 3인방 엿보기

by ISTJ, 회계쟁이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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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4대왕 선조의 서장자인 임해군을 시작으로, 정원군과 순화군까지 선조의 막장 왕자 3인방은 저마다 저지른 패악과 행동이 가히 심각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광해군이 형제 왕자들로 인해 심히 고생하지 않았을까, 그 결과가 형제들을 죽이는 행동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요 언행>

1. 임해군은 폭행, 강도, 재산 강탈, 공물 약탈, 살인 등으로 모자라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순화군과 함께 병력을 모으라 했지만, 술에 절어 백성들에게 오히려 행패를 부리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왜군에게 붙잡아 넘기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2. 순화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으로,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잔혹한 행동을 일삼았다고 한다.

동물 학대는 기본이고, 임진왜란 이후 살인에 빠져들어 매년 10명 가까이 자신의 쾌락을 위해 죽이는 연쇄살인마의 모습을 보였다.

거기에 더해 강간, 폭행은 기본 탑재된 악행 모드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3. 정원군은 과거 시험에서 처남을 합격시키는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고, 군적 회피자들에게 돈을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는 일도 있었으며, 하원군의 노비들과 자신의 노비들이 싸움을 벌이자, 일을 부추기며 하원군의 부인마저 납치하는 일을 벌였다.

 

 

 

<주요 에피소드>

1. 임해군의 부하 김덕윤이 도승지 유희서 살해사건에 가담하여 체포당하고, 감옥에서 의문사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 속의 한음 이덕형이 상소를 올리자, 임해군은 자신과 무관하다며 발뺌하였다고 한다.

선조는 그런 임해군을 질책하는 선에서 그치고, 임해군을 수사하던 포도대장을 파면하고 징역형에, 도승지 유희서의 아들은 곤장 100대를 때리고 유배를 보낸다.

처음에는 사형을 생각했으나, 유희서의 어머니가 손자만은 살려달라고 하여 형을 감면한 것이라고 한다.

 

2. 위의 일로 사관도 기가 막힌 듯, “왕법이 시행됐다면, 임해군은 당연히 형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총명을 잃고 오히려 개인의 사랑에 빠져 그의 악을 모르고 죄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문과 신문의 형벌이 도리어 도적을 잡는 책임을 맡은 중신에게 미치게 했다."라고 한탄했을 정도라고 한다.

 

3. 순화군이 사람을 살인 중독 증상을 의심케 할 정도로 계속하자, 하루는 임해군마저 순화군을 꾸중하자, “저는 남을 패기만 하지만 형님은 집과 전답까지 빼앗지 않느냐?”면서 궤변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4. 순화군이 수원으로 유배되었을 때, 역신을 쫓는 굿을 하고 있던 맹무녀를 잡아 들여 폭행하며 위아래 치아를 1개씩, 장석을시(장돌똥)의 위아래 치아 9개씩을 쇠뭉치로 때려 부수고, 집게로 잡아 뽑아버리다.

순화군을 피해 수원 사람들이 도망을 쳐서, 수원이라는 도시가 망할 지경이 되었다고 하며, 사또들도 순화군을 피해 도망가기는 매한가지였다고 한다.

 

5. 순화군의 악행이 하도 거듭되자, 어지간한 아들들의 범죄에는 눈도 깜빡이지 않을 정도로 편애가 심각했던 선조조차 신하들에게 차라리 주색잡기나 탐하면 걱정이라도 하지 않겠는데, 아비로서 면목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6. 정원군은 하원군 부인 납치 사건에서 하원군의 아들들이 울며 애걸복걸하자, 새벽이 되어서야 풀어주었다고 한다.

하원군의 노비들은 그러는 동안 호된 매질을 당했던 것은 덤이었다. 결국 이 일로 정원군은 탄핵을 당한다.

 

 

 

7.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16대 왕 인조가 되자, 정원군은 대원군으로 격상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원대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하는 일을 밀어붙인다.

아마도 원종으로 추숭하지 않으면 조선의 임금 중에서 유일하게 왕의 아들이 아닌 왕이 되는 것이 인조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8. 참고로 조선의 임금 중에서 추존왕의 아들인 임금은 덕종의 아들 성종, 진종의 아들 정조, 익종의 양자 고종, 익종의 아들 헌종이 있다.

 

 

 

<다른 일면>

1. 임해군은 광해군에 의해 교동도로 귀양을 간 후, 그곳에서 의문사 했다고 한다.

 

2. 순화군은 수원에서 서울로 압송된 이후 우여곡절 끝에 집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후 풍을 맞았는데도, 선조조차 아무런 조치를 취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년 뒤 사망했다.

 

3. 정원군은 능창대군의 옥사 과정에 연루되어 살고 있던 집을 빼앗기게 된다. 광해군은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경희궁을 짓는다. 정원군은 이후 술병과 화병으로 사망했다.

 

4. 인조 이후 왕위에 왕통은 모두 정원군의 직계 후손이다. 으음

 

 

 

<나의 인물 요약>

폐위되어 실록이 되지 못하고 광해군 일기가 되어 버린 내용 중에 광해군이 이들로 인해 얼마나 고통받았는가 하는 대목이 있다.

 

광해군 일기 147, 광해군 11년의 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는 내용.

 

같은 광해군 일기 147권의 글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先王)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는 내용이 적힐 정도였으니, 선조의 아들 막장 왕자 3형제는 광해군의 폐위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며, 광해군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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